바이블 써퍼 Bible Supper | 요한 계시록 9장

요한계시록 9장

요한계시록 9장은 다섯째와 여섯째 나팔을 통해, 하나님이 악을 드러나게 허용하시되 여전히 한계를 두시는 장면을 그립니다. 목적은 공포가 아니라 회개로의 소환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차갑게 말합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아니하고”(9:20–21). 지난 시간들에 소개한 N. T. 라이트의 해석과 그 외 구속사적 이상주의 (Redemptive-Historical Idealist) 성향을 보이는 다른 학자들의 견해를 참고하여 오늘날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아보려 합니다.

나팔 서막은 예배와 기도로 시작합니다(8:3–5). 성도들의 기도가 향이 되어 하늘에 오르고, 그 후에 제단의 불이 땅에 던져집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기도를 통해 역사 속에 개입하십니다. 그러므로 나팔 재앙은 무작위적 분노가 아니라 응답받는 기도의 한 방식, 곧 경고의 은혜입니다. 또한 반복되는 “3분의 1”은 “완전한 파괴”가 아닌 부분적, 제한적 심판임을 알립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산산이 부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잠에서 깨우려 하십니다.

이 장면은 마치 “깨어 있는 악몽”과 같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무저갱을 열고, 연기 속에서 슈퍼 메뚜기가 나오지만, 그들은 풀려났으나 매여 있습니다—기간은 “다섯 달,” 대상은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자,” 임무는 “죽이지 말고 괴롭게 하라.” 이 모든 제한은 하나님이 여전히 주권자이심을 밝힙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사실을 기억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때로 악을 드러나게 허용하십니다.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반(反)창조적 에너지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우리는 악의 실체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둘째, 그럼에도 하나님은 경계선을 긋고 속도를 제한하십니다. 고통이 현실이더라도 끝이 있습니다(“다섯 달”). 포이스레스(Vern S. Poythress)는 이를 구속사적 이상주의의 관점에서, 교회 시대 전반에 반복되는 영적 억압과 사회적 혼란의 전형으로 읽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정확히 무엇이냐”(헬리콥터냐, 신형 무기냐??)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 어떻게 견디고 깨어 있느냐입니다.

금제단에서 나팔 소리가 울리자, 유프라테스에 결박된 네 천사가 풀리고, 엄청난 기병대가 밀려옵니다. 고대 로마의 파르티아Parthia 기병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정치, 군사적 악몽입니다. 라이트는 이것이 “신문 예언(newspaper prophecy, 계시를 신문의 헤드라인 식으로 해석하는 태도)”이 아니라 제국적 폭력과 전쟁의 영을 드러내는 상징임을 강조합니다.

이 장의 핵심은 끝부분(9:20–21)에 모입니다. 사람들은 귀신과 우상을 섬기며, 그 열매로 살인, 주술, 음행, 도둑질이 만연합니다. 라이트는 “사람은 자신이 예배하는 것을 닮아 간다”고 요약합니다. 비(非)하나님을 섬기면 ()인간으로 변해 갑니다. 고먼(Michael J. Gorman)은 여기에 더해, 나팔들이 제국의 우상정치—군사주의, 지배, 착취적 경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예언적 수사라고 말합니다.

소수이지만 유익한 시도는, 요한계시록을 어린양-중심(십자가-중심) 신학으로 일관되게 읽어 나팔십자가에서 이미 집행된 하나님의 판단과 승리가 역사 속에 메아리치는 표징으로 파악하는 견해입니다. 곧,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가 ‘나팔’의 신학적 원형이며, 계 9장은 그 십자가적 심판의 현현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1. 제단–향–불: 십자가 제사의 여운. 나팔 서막의 제단(8:3–5)은 성전 제사와 맞물려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을 소환합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를 “지금 이 세상의 심판”(요 12:31–33)으로 묘사하지요. 그러므로 나팔은 십자가에서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판단이 역사 속에서 경고적 표징으로 울리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2. ‘다섯 달’과 ‘3분의 1’: 이미-아직 사이의 제한. 고통은 실재하지만 제한을 받습니다. 이는 결정적 저주가 이미 어린양 위에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신학적 독해가 가능합니다. 십자가가 최후 심판의 중심을 선행적으로 감당했기에, 역사 속의 심판은 부분적, 경고적으로 남아 인간을 회개로 소환할 뿐입니다.
  3. 무저갱의 열림(9:1–6): “어둠의 권세의 때.” 다섯째 나팔에서 무저갱이 열리고 괴물 같은 메뚜기가 올라옵니다. 이는 “이 때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눅 22:53)를 상기시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악이 최악을 드러내도록 허용하셨고, 동시에 그 악을 속박하셨습니다(골 2:15). 계 9장의 괴물들도 사람을 죽이지 못하고(9:5) 기간이 제한됩니다(‘다섯 달’). 악을 풀어 주어 그 악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역설이 여기서 아포칼립틱(묵시적) 영상으로 재현됩니다.
  4. 유프라테스의 군마(9:13–19): 제국 폭력의 십자가적 폭로. 여섯째 나팔의 기병대는 제국의 폭력과 공포의 영학(靈學)을 상징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제국-종교 연합의 폭력을 온몸으로 받으심으로 그 정체를 폭로하셨습니다. 마태는 십자가 순간을 흑암·지진으로 묘사합니다(마 27:45, 51). 계시록의 번개, 지진 모티프(8:5; 11:13)는 그 십자가적 우주격변을 반복·확대하여, 오늘의 제국적 우상정치를 향한 하나님의 ‘No’를 들려줍니다.
  5. 계 9장의 결론(9:20–21): 우상숭배에서 십자가 제자로. “회개하지 않음”은 십자가의 빛 앞에 드러난 우상숭배의 완고함입니다. 이 독해는 교회의 길을 분명히 합니다. 즉, 우리는 “어린양의 방식(비폭력, 자기내어줌, 증언)”으로 나팔의 경고에 응답해야 합니다.

왜 회개하지 않는가—우상숭배의 비인간화

본문의 마지막 두 절은 칼날 같습니다. 사람들은 귀신과 우상을 섬기며, 그 열매로 살인, 주술, 음행, 도둑질이 만연합니다.

어린양의 길을 따르는 교회는 폭력과 보복이 아닌 증언과 인내로 응답해야 합니다. 결국, 계 9장은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 예배 교과서입니다. 우상숭배가 윤리적 해체를 낳는다면, 창조주 예배가 인간다움을 회복합니다. 예배가 삶을 만들고, 삶이 다시 예배를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악이 스스로 무너지도록(자기 무게로 붕괴되도록)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 사이 교회는 예배와 기도로 하나님께 붙고, 증언과 사랑으로 세상 속을 걷습니다. 요한은 9장에서 회개없음을 보았지만, 11장에서 증언을, 마지막에 새 창조를 보았습니다.


  1. 요한 계시록 9장에서 나에게 가장 강하게 남는 이미지는 어떤 것이었나요?
  2. 요한 계시록을 계속 읽어 나가며 성경 전체 또는 일정 부분 예)복음서, 출애굽기 등.. 에 대해 가졌던 평소 견해가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3. 요한계시록 9장을 읽은 후… 나에게 “인내”란?

우리가 해야 할 기도와 회개를 알게 하옵소서. 세상에 패턴에 휩쓸리지 않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예배를 드리기 위해, 우리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고 분별하는 삶 될 수 있게 양육해 주소서. 아멘.

오늘도 굿 해피 써퍼 되세요 😊


참고 문헌 | Bibliography

Bauckham, Richard. The Theology of the Book of Revelat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Gorman, Michael J. Reading Revelation Responsibly. Eugene, OR: Cascade, 2011.


Poythress, Vern S. The Returning King: A Guide to the Book of Revelation. Phillipsburg, NJ: P&R, 2000.


Wright, N. T. Revelation for Everyone.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1.


Featured Image: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 The Fifth Plague of Egypt,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