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써퍼 Bible Supper | 요한 계시록 17장

대 피테르 브뢰헬 (Pieter Bruegel le Vieux) 바벨탑, 1563 빈 미술사 박물관

지난 시간에는 요한계시록 17장을 읽고, 상징과 역사, 그리고 오늘의 신앙 사이의 연결을 차분히 더듬어 보았습니다. 영적 간음의 이미지가 단지 도덕적 타락을 넘어 하나님을 대체하는 체제와 우상적 충성의 문제를 겨냥하고 있음을 살폈고, 교황권을 포함한 역사적 종교 시스템들이 어떤 때에는 복음의 통로가 되었고, 또 어떤 순간에는 복음의 본질을 흐리기도 했다는 복합적 평가도 나누었습니다.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가 제국과 맞닿으면서 생겨난 변화들이 어떻게 신앙의 얼굴을 바꾸어 왔는지 돌아보며, 인간의 기획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 사이의 긴장도 성찰했습니다.

특히 본문 속 “일곱 산”과 “일곱 머리, 열 뿔”의 상징을 두고는 로마와 황제 숭배의 맥락을 염두에 둔 역사적 독해와, 장차 완성될 심판을 강조하는 미래적 독해를 함께 비교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해석의 스펙트럼을 인정하되, 상징을 특정 집단이나 인물에 단정적으로 등치하기보다 본문이 겨냥하는 더 큰 메시지—하나님 아닌 것에 절대 충성을 요구하는 세력들, 그리고 그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귀 기울이는 태도였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과 자비를 동시에 드러내는 자리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고, 예수님의 희생은 인류의 죄와 결점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대응이며, 그 안에서만 참된 자유와 새로움이 시작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독교 전통과 실천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해 왔는지, 그리고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때로는 기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관습으로 되돌아가기도 한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했습니다.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노력과 성취를 앞세우는 순간 복음은 쉽게 왜곡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원점으로 되돌아 간다해도 진의의 중심이 내가 되는 순간, 내가 돌아간 곳은 원점이 아니라 왜곡된 계책의 자리, 가증한 자리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붙드는 일이야말로, 해석의 다양성과 역사적 복잡성을 지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실질적인 과제임을 확인했습니다.

정리하면, 계시록 17장은 상징의 미로를 통해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책이 아니라, “누구를 경배하며 어느 나라 시민으로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는 말씀입니다.

써퍼 전에 잠간 애피타이저로 나왔던, 사막으로 풀려나서 생명을 유지하는 대속죄일의 ‘아사셀’ 염소가 상징하는 대속의 은혜를 기억하며, 역사와 전통을 분별의 눈으로 바라보고, 거짓 충성의 유혹을 이겨 내어, 오직 어린양께 충성하는 삶으로 오늘을 걸어가야겠습니다.


  1. 요한 계시록 17장에서 나에게 가장 강하게 남는 것은 어떤 것이었나요?
  2. 진짜를 따라가기 위해 고안된 계책이지만 진짜처럼 자리잡고 있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3. 요한계시록 17장을 읽은 후… 나에게 ‘정통’이란?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과 귀를 붙잡아 주소서. 더우기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주셔서 내가 아버지께로 가까이 가려는 모든 이유가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게 하여 주소서. 내가 얼마나 더 잘 믿고 내가 얼마나 정통인지를 겨루는 어리석은 자들 되지 않게 하소서. 주께서 부르시는 소리에 그 바벨론에서 아버지의 백성답게 빠져나오게 하소서. 아멘.

해피 써퍼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