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바벨론 포로시대 | 예레미야 28:1-4 구역 공과

The Tower of Babel by Peter Bruegel the Elder, 1563

2025.11.30 주일 설교 요약

예레미야서 28장 본문은 왕 앞에 거짓 예언이 선포되는 장면으로 남유다의 멸망이라는 역사적 시점에서 오늘 교회의 자리를 비추며, 이미 회복된 우리가 다시 망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남유다의 멸망 원인은 왕 시드기야가 여호와의 진정한 말씀 앞에 겸손하지 않았고,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고 멸시한 교만이라고 평가되는데, 이는 오늘날 왕 같은 제사장인 성도들에게주는 경고입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이 꺾였다’는 희망적인 오라클을 택해 ‘남유다의 멸망과 70년 간의 포로 생활’ 이라는 경고를 외면했는데, 이것은 ‘자기 눈에 옳은 대로’ 선택한 악이며, 인간의 욕망에 공명resonate하는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은 신성모독에 해당합니다. 참된 겸손이란 내가 바라는 ‘희망적 메시지’가 아니라 그 반대편인 우리의 고난과 질고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부정하거나 조롱한다면 교회는 결국 “교회의 바벨론 포로시대”를 통과하며 자기 교만을 깨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지자가 그에게 경고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재차 그에게 권유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왕은 그것을 듣지 않았지요. 그것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본인 입장에서 반박하자면 이것은, 남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는 올곧음, 또는 다른 의견에 휩쓸리지 않는 소신을 악하게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역사기록은 그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것입니다. 교회적으로 말하자면, 그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이 구원역사의 커다란 흐름과 그것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을 밝혀주었음에도,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교만인지, 아니면 소신인지는 그후의 역사가 판단해 주는 것입니다.

  1. 남유다가 멸망한 첫번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처사가 교만한 것이었는지 언제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은 그의 어떤 면을 ‘악하다’라고 평가합니까?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내가 과거에 한 일이 소신이라기 보다는 교만이었음을 인정하게 된 일이 있는지 나눠봅시다.

두번째 원인을 찾아보겠습니다. 모든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들과 백성들의 범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두번째 원인이라고 한 들,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막아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포로로 끌려가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올곧음이 아닌 교만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역대하로 돌아와서, 이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들과 백성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역대하 36장 16절에,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선지자…그리고 그 나라의 왕같은 제사장들이란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들이 협력하여 악을 이룬 것입니다. 어떻게 함으로? 첫째 말씀을 듣지 않고, 둘째 말씀을 멸시하고! 이것이 교회의 현실이란 지적이지요.

2. 남유다가 망한 두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잘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교만하게 행했다는 것이 언제 드러납니까?

선지자와 왕 같은 제사장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멸시하는 태도가 교회의 현실이라는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시간이 흐른 후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이렇다면 지금 무엇을 바꾸겠습니까?


이 2개의 소리가 귀에 들렸을 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보다는, 하나냐 선지자의 말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채택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슨 일이 된 것입니까?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에 애써 귀를 닫은 것입니다. 역사는 이것을 시드기야의 악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악이란, 선택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옳은대로 선택을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준이 자기에게 있었다는 것이고, 자기 자신이 판단의 주체이자, 판단의 기준이 되어 버린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겸손이란, 하나냐가 아닌, 예레미야의 편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인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에 반대되는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건,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과 고난과 질고를 말하지요. 그러나 그것을 오히려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이런 일이지요.

3. 시드기야의 귀에 하나는 심판을 또 다른 하나는 희망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이 때 시드기야는 희망을 주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희망사항이 투영된 메세지를 ‘번영 복음 prosperity gospel’, 그런 복음을 듣고 따르는 것을 ‘기복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선택을 잘못한 것’과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선택한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으려면 인간인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에 반대되는 편에 서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시편 2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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