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우나의 타작마당 | 사무엘하 24:10-25 소그룹 공과

David and Araunah making offerings at the altar (circle of Lambert Jacobsz, 17th century)

2026.1.18 주일 설교 요약

다윗의 인구조사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이야기(삼하 24장)는, ‘복’과 ‘용서’를 우리가 당연히 여겨온 방식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비추어 줍니다. 회개가 곧바로 문제를 지워버리는 지름길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좁은 문인지, 본문은 우리를 묻고 또 멈춰 서게 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든 천사의 손이 멈춘 자리, 바로 그 타작마당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살피다 보면, 심판을 피하려는 종교적 몸부림과 복음의 길 사이의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한편으로 심판을 피하고 생명을 스스로 보존하려는 의도는 겉으로는 지극히 당연하고 심지어 고귀해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회개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은, 죄의 누설이 낳는 수치와 그 대가를 감당해야 하는 깊은 고통과 낙심을 동반합니다. 이 긴장 사이에서 예수님을 뵈옵고, 심판을 복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할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을 바라고 머무르기를 소망합니다.


  1. “누구냐?”를 묻는 것이 아니지요. 그들이 장차 올 진노를 피하려 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얄데이 찌포님”, 곧 독사의 자식이란, 장차 올 진노를 피하려는 의도를 가진 자들을 가리키지요. 그 무리가 그걸 피하기 위해 세례받는 길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대부분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 같은 종교인들이었지요.
  2. 그때, 그 자들을 독사의 자식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노를 피하려는 그들의 의도이지요. 심판을 면하고, 혹 심판을 당하더라도 형량이 가벼운 것으로 받으려는 마음입니다. 그러기 위해 세롄들 못받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해서, 그들에게 허물의 가리움이나 죄의 용서가 보장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문제 1. 진노를 피하려한다는 것이 왜 그렇게 나쁜 것일까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어떤 의도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17. 그러나, 우리가 읽지는 못했지만, 이 두 줄의 마스길의 행간에는 다윗의 실제 역사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아는 자들은, 그 “자복”과 “용서” 사이에 얼마나 큰 간격이 있는지를 알지요. 그 사이에 다윗은 죄를 짓는 족족, 사함 받은 것이 아니라, 정죄를 당하고, 보복을 당하고, 또 즉결 심판을 받고, 결국 형벌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다윗의 마스길)

문제 2. 다윗이 죄악을 숨기지 않고 자복했을 때 “곧” 하나님께서 그 죄악을 사하셨다는 우리 성경을 읽으면 마치 하나님께서 즉시로 용서해주셨다는 것 같은 뉘앙스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곧” [“and”]이란 실제로 얼마나 “큰 간격”이었나요?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간격을 겪게 하신 것인가요?


26. 그러나 그래서 그런 게 아닌 것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것입니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번제가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어디 입니까? 나중에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곳이고, 그곳은 예수께서 영단번의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달린 곳인 것입니다.

27 .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사흘 만에 그치는 이유는, 다윗이 충분하게 벌을 다 받아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인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모두가 다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자 인간이신 성삼위 하나님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의 죽으심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제 3. 충분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미 벌을 받을 만큼은 받았는데, 그 벌이 그친 이유가 내가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이라는 논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나요? 진정으로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시 32:11)” 하며 기뻐할 수 있나요? 무엇이 이 논리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데에 걸림돌이 될까요? 다윗은 어떻게 이 논리를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끝으로, 시편 32편을 읽으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로 모임을 마무리 합니다.

설교 전문 PDF